토템은 씨족의 상징물로, 토템에는 씨족 운영에 필요한 금기와 금기의 배후인 욕망이 공존한다. 불안하지만 매 혹적이고, 위협적이지만 경이로운 김병호의 작품 역시 물신 숭배의 욕망과 금기에서 배태된 포스트모던적 토템이다. 토템으로서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주요 어휘라면 불안과 경이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불안은 억압된 것의 복귀에서 파생되며, 경이는 질서의 파열로부터 생성된다. 이로써 김병호의 조각은 억압된 욕망의 복귀인 동시에 안정과 질서의 위협으로써 불안·경이를 시각화하는 우리 시대의 토템이라 할 수 있다.



토템의 검은 미학(dark aesthetics) – 불안과 경이

김병호 작품에 대한 처음 인상은 대부분 금속의 물질성이나, 기하학적 명징, 또는 세련된 조형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은 기저에 불안과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명명한 ‘도금시대 (Gilded Age)’처럼 김병호의 조각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거울같이 빛나는 표면과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는 고도 의 완성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럴수록 더욱 내재 적 불안과 섬뜩함을 보여준다. 할 포스터는 위와 같은 검은 미학(dark aesthetics)의 특성을 자코메티의 <목이 잘 린 여인 Woman with Her Throat Cut>(1932)의 예로 설명하였다. 사마귀를 닮은 해체된 여인 형상은 날카로운 모서리와 뾰족한 가시 등 위협적인 형태를 띠는데, 포스터 는 이것을 결핍이 낳은 욕망과 금기·억압에 의한 좌절, 그 리고 이로 인해 생긴 대상에 대한 경멸과 분노의 투사로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불안하고 위협적인 <목이 잘린 여 인>의 검은 미학은 욕망, 금기, 경멸의 응집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안도와 만족의 아름다움이 아닌, 유혹적 이지만 치명적이고, 불안하면서 경이로운 아름다움, 즉 불 안이 창조한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을 경 험하게 된다.

김병호의 조각 역시 이와 같은 검은 미학의 범주에 있다. 그의 작품은 불안과 두려움을 통해 긴장을 서서히 고 조시키며 압도한다. 또한 이 불안은 관능적이고 촉각적인 표면과 화려한 메탈 컬러에 의해 경이로움으로 전환된다. 경이라는 단어가 중세부터 사용되었으며, 질서에 생긴 균열을 지시하였다는 점에서 김병호의 작품을 이해하 는 결정적 단서를 얻게 된다. 기하학적 정확성과 대칭, 균형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한편 그러한 질서 와 규범에 어긋난 일종의 자기 부정적인 경이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정원 Garden>(2013)은 다양하고 활기찬 색과 알루미늄 스틱이 만든 질서가 눈에 띄지만, 바닥을 찌를 듯이 아찔한 끝과 절묘한 7도의 기울기는 묘한 긴 장과 불안을 유지한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은 안정 지향적인 취향의 안일함을 거절하고, 맹목적인 해피 엔딩을 거부한다. 이러한 특성은 <의심 Doubt>(2013)이나, ‘기억하기 위한 기념일 Anniversary about the Memories’ 연작과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김병호 조각의 베일 듯한 날 선 모서리, 찔릴 것 같은 첨예함, 환청처럼 반복되는 미세한 피에조(piezo)의 기계음 등은 무미건조한 응시보다 안도할 수 없는 불안을 요구한다.



숭고한 반복
검은 미학은 한편 숭고(sublime)의 계기이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 심해의 정적, 그리고 단일한 형태의 무한 반 복이 주는 공포에 기반한다. 이러한 대상이 초래하는 두려움은 모순되게도 다시 보고 싶은 미적인 쾌를 선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숭고이다. 숭고의 계기로서 단일한 형태의 반복은 2006년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김병호의 미학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의 반복성은 10여 년 동안 지속된 대표 연작 ‘조용한 꽃가루 Silent Pollen’나, ‘수직의 정원 Vertical Garden’ 연작의 형식적 근간이 되었다. 특히 2009년의 <300개의 조용한 꽃가루 Three Hundred Silent Pollens>는 개체수를 명시한 첫 작업으로, 이를 통해 김병호는 반복·복제의 화두에까지 접근한다. 적게는 70여 개, 많게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나팔 형태의 모듈이 반복되는 ‘조용한 꽃가루’ 시리즈는 그 자체로 전 근대에는 불가능했던 대량 생산 체제의 상징이자, 동시대 복제 시스템을 가리키는 지시체이다. 원본·복제의 구분이 무의미한 포스트모던적 반복은 자가증식은 물론, 가공할 만한 규모를 조성하고 거대 생명체와 같은 위용을 자랑함으로써, 장엄과 경외 때로는 경악할 만한 숭고를 경험하게 한다.

이후, 그의 모듈은 2011-13년 사이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291개의 눈물 Two Hundred Ninety One Drops of Tear>(2013)에는 눈물을 담는 듯 오목한 디스크 형태가, ‘수직의 정원’ 연작에서는 목이 긴 수많은 난형(卵 形)이, 그리고 <조작 The Manipulation>(2013)과 <매개 기억 Mediated Memory>(2016)에서는 탄환처럼 뾰족 한 형태가 등장하였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모듈은 일견 레디메이드 부속품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 레디메 이드‘처럼 보일 뿐’, 엄밀히 기성품이 아닌 유사-레디메이드(pseudo ready-made)의 허위적 특성을 띠고 있다. 그의 모듈은 형태의 아이디어가 그래픽 프로그램을 거쳐 탄생시킨 김병호 고유의 ‘디지털 피조물’이자 동시에, 대량복제된 생산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병호의 조각은 창조를 선택으로 대체한 뒤샹의 혈통을 잇는 듯 보이지만, 실상 이마저도 빛바랜 전통임을 암시함으로써, 모더니즘의 낡은 권위를 기만하는 블랙 유머를 던진다.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의 기계 토템

위와 같은 반복은 사실 강박을 본성으로 한다. 프로이트는 강박적 반복을 트라우마(trauma)에 대한 능동적인 자기 조절로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반복은 방어기제의 작동 결과로서, 가학적 고통을 스스로에 반복하여 트라우마를 완충하는 일종의 자가치유 작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검은 미학이나 강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는지를 알 수 있다. 불안을 야기하는 반복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보존과 연결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김병호의 반복이 점차 특정 형태를 구현하는 양상 또한 다른 각도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예리한 모서리와 날카롭고 뾰족한 침과 같이 두려움의 형태를 반복하는 형식 역시 포스트모던 사회의 병폐적 욕망이라는 트라우 마에 대한 방어기제의 작동으로 해석된다. 특정한 형태를 구현하는 변화는 이 같은 해석에 더욱 무게를 실어 주는데, 송광사에 설치되었던 <매개 기억>(2016)과 2018년부터 제작된 ‘신 Gods’ 연작은 강박적 아름다움 이면에 숨겨진 자기방어와 자가치유의 작용을 보다 공동체적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쌓은 돌탑을 연상시키는 <매개 기억>(2016)은 전시 공간으로 한정된 화이트 큐브가 아닌, 다양한 문맥을 형성하는 장소에 설치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다각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공공 공간의 맥락적 의미와 그 가운데에서 공통의 정서로 집결되는 힘에 주목했다고 설명하였다. 같은 의미에서 <매개 기억>을 통해 “해탈의 씨앗을 품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게 된다”는 신도들의 고백 또한 검은 미학을 뚫고 드러난 순작용의 포착이 아닐까 싶다. 이제 김병호에게 있어 반복은 단순한 나열이 아닌 어떻게 반복하느냐와 같은 확장된 문제로 점차 진화하였다.

<부드러운 충돌 Soft Crash>(2011)과 <공간접점 Aero-Interface>(2012)은 이와 같은 형식 실험의 기점에서 만들어졌다. 같은 시기 김병호는 반복을 통해 어떻게 구체적이고 특정한 형태를 만들 것인지에 집중하였다. 그에 따라 모듈 간의 결합 양식 또한 중요한 형식적 특성으로 부상하였다. 모듈을 본체에, 또는 모듈과 모듈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는 앞서 언급된 유사-레디메이드와 동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용접조각과 같은 모더니즘의 위대한 업적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용접 대신 모듈 내부에 나사, 핀 같은 결합 장치를 이용해 모듈을 끼우거나,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을 통해 모듈끼리 서로 한 치 오차 없이 맞물리도록 조립하는 정밀함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2016년 이후의 ‘수직의 정원’ 연작과 같은 작품들은 이음새 없이, 마치 기계-생명체 같은 혼종적 존재, 또는 기계 토템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반사를 극대화할 수 있는 형태와 표면 형식에 집중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기계 토템은 내재된 욕망을 상기하듯,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표면으로써 섹슈얼리티를 극대화하면서도, 터부시된 토템과 같이 좀처럼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두려운 동시에 매혹적인 김병호의 조각은 ‘치명적 매력(fatal attraction)’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아름다운 상(像) Beautiful Reflection>(2018)과 그것의 모태가 되는 ‘기억하기 위한 기념일’이나, ‘수직의 정원’ 연작과 같은 최근의 작품은 특히 포스트모던 시대의 물신 숭배에서 파생된 관능적 신성과 욕망에 따른 금기, 또는 포스트 휴머니즘이 불러온 공포증이 모두 응집된 기계 토템으로 설명된다. 금기에 따른 타부가 오히려 강한 욕망의 반증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다른 한편 김병호의 기계 토템은 관능적 충동과 파괴적 충동의 상호의존 관계가 빚어낸 검은 미학의 결정체이자, 욕망으로 점철된 물신 숭배사회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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