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직선, 수직, 수평, 평면, 그리고 두께.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용어들은 사실 지극히 인간 고유의 창조물이다. 자연에는 이처럼 절대적인 수리 개념에 의거한 기하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물질문명의 특징인 질서정연하고 각이 딱 맞는 합리적인 모습은 결국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인간의 성취나 다름없다. 김병호는 이런 물질문명이 뿜어내는 매력을 거침없이 조형화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원> 연작이다. 그는 자연을 인공화한 정점이 정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만든 정원은 수많은 선이 정교한 규칙 아래 일종의 패턴처럼 반복되며 수평, 수직으로 확장한다. 선 끝에는 “질서정연한 문명에서 변종이 된 욕망의 혹”이라고 표현하는 타원구가 달려있는데, 거울에 비견할 만큼 외면을 매끈하게 처리해 눈이 시릴 정도로 끊임없이 주변을 반사한다. 숨 막힐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광경을 목도하면 현란을 넘어 미쳤다는 탄성이 나온다. 작가는 이를 통해 창작자조차 벗어날 수 없는 물질문명의 화려함과 치명적인 유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안기는 물질문명이 나쁜 걸까? 작가는 선악을 논할 수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선을 긋는다. 물질문명의 일원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학습하고 내재화한 집단 기억의 현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용한 증식> 연작은 공동체의 규범과 체계, 시스템 등 집단 기억에 기반한 통제와 질서에 바치는 헌사라 할 만하다. 어릴 적 누구나 손뼉 치고 보았을 법한 매스 게임, 에어쇼, 군악대 등 집단이 구축하는 조밀하고 체계적인 양태와 클라이맥스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조응을 직선 다발이 역동적이고 절도있게 꺾이는 설치 작업으로 장대하게 풀어냈다. 기억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지속적으로 확장 중이다. 예컨대, <신> 연작은 같은 모양, 같은 크기, 같은 두께의 거대한 금속판 여러 개를 종이접기 하듯 간편하게 변형하고, 수면 위에 직립한 듯 비범하게 배치해 마치 절대적 존재처럼 꾸며놓았다. 세대를 거듭하며 강력하게 계승되는 인공의 아름다움과 성취에 대한 기억은 스스로 만들어낸 절대적 가치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으로 끝맺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의심하라! 주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어떻게 인식하고, 개입할지 고민하라!”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추구하는 철학적인 면모가 우리 앞에 물화되는 방식이다. 그는 현대 물질문명의 생산 체계를 철저히 답습한다. 산업 혁명 이후 대량생산이 보편화되면서 규격에 맞게 제조된 각종 제품은 우리 삶을 자연스럽게 지배 중이다. 그는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를 창출한 주인공인 생산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면모의 시작점은 기성품화(化)다. 손으로 직접 만들거나, 원래 존재하는 물건을 활용하는 레디 메이드를 넘어, 김병호표 부품을 설계하고 생산해 스스로를 현대 산업 시스템에 밀어 넣는다. 대량 생산한 부품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연결해 합리성을 극대화한 결합체인 모듈로 구축한 후, 정교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고 조립하며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문명이 추구하는 시스템과 합리성을 몸소 경험한 덕분에 그의 답습은 창조 활동으로 직결된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분업화다. 작가는 기획자, 디자이너, 엔지니어, 건축가, 구조설계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밀접하게 공생하며 작품에 분업화를 직접 개입시킨다. 이때 빛을 발하는 존재가 설계 도면이다. 작품에 대한 각종 정보를 유니버설한 언어로 담은 설계 도면은 작품 완성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를 긴밀히 잇는다. 하지만 설계 도면만으로 손쉽게 실물을 얻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노하우가 쌓여도 새로운 작품을 시도할 때마다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작 공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엄밀히 관여한다. 폭넓은 식견으로 적절한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제시하고, 전문가를 찾아가 명확히 구현하도록 설득하는 모습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PM과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 도처에 존재하는 물리적, 인적 인프라를 활용하는 제작 방식은 여러 장점을 가져온다. 그는 팬데믹 때 한국에 머물며, 작품 제작부터 설치까지 중국 현지에서 모두 진행했다. 전시가 끝난 대형 작품은 작은 단위로 분리해 운송의 효율화를 꾀하고, 작품이 훼손될 경우에는 해당 부분만 교체해 작품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관리한다. 그야말로 합리성의 현신인 셈이다.
김병호는 오는 12월, 전속 화랑인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오랜만에 대규모 개인전을 갖는다. 내년 3월에는 홍콩과 중국 선전에서 두 개의 개인전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는 한국 작가로서 드물게 중국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8년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에서 데뷔전을 치른 후, 2022년 중국 선양 K11 아트 스페이스와 우한 K11 아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잇달아 가졌다. 2025년 3월 그는 홍콩 레오 갤러리에서 조각 작품과 더불어 거의 처음으로 평면 작품을 선보이고, 중국 선전 주피터 미술관에서 10m에 육박하는 대형 작품 및 실험적인 작품을 대거 공개할 예정이다. ‘아트바젤 홍콩’ 기간에 맞춰 3개월 가까이 열리는 전시의 끝자락에서 그가 내뱉을 소감이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