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움직인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 김수영, 「꽃잎2」
이것은 금속을 따라 흐르던 힘이 살로 부풀고 부푼 살이 입을 벌려 꽃으로 피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김병호의 바깥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동시대성과 현대성
김병호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동시대성(contemporaneity)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 문명이 초래하는 매혹, 공포, 불안, 의심을 그것의 중추인 합리적 생산 기술과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형상화하기. 김병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해왔으며 작가 자신의 다양한 언급들 또한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의 목적은 김병호 작품의 표면을 덮고 있는 동시대성의 이면 혹은 바깥을 살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김병호의 작업에서 보들레르적 의미의 현대성(modernity)을 읽어 내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역사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시적이고 영원한 것을 끄집어내는 일을 현대성의 문제로 사고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현대성은 컨템퍼러리 아트와 모던 아트의 역사적 구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예술을 예술이도록 하는 동시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 역사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결합의 문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예술이란 무한을 되찾기 위해 유한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문제기도 하다.
두 가지 비가시성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자 한다는 김병호의 의도 자체는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다. 예술은 본래 이미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기보다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일이며 현재의 소리를 재현하기보다 들리지 않던 무언가를 들리도록 만드는 일이다. 감각되지 않던 것을 감각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지금껏 없던 감각이 출현하도록 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예술가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예술가의 독특성을 묻는다는 것은 비가시성 일반이 아니라 어떤 비가시성을 어떤 방식으로 가시화하는가를 묻는 일이어야 한다.
김병호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의 치밀하고 빈틈없는 관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결과물로서의 작품뿐만 아니라 작업과정 자체를 통해서도 현 세계를 구성하는 합리성, 효율성, 규칙성, 필연성 등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세계의 현재 상태 혹은 질서라는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비가시성은 정적인 성격을 가지며 김병호 작업의 다수적(major) 벡터는 이 정적 비가시성의 가시화를 겨냥한다.
그런데 김병호의 작업에는 이와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비가시성을 탐구하는 소수적(minor) 벡터 또한 존재한다. 소수적 선(線)이 추적하는 것은 현 세계의 질서가 아니라 이 세계 자체를 만든 힘의 존재와 흐름이다. 발생의 비가시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두 번째 비가시성은 힘과 운동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적 성격을 갖는다. 정적 비가시성이 현실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비가시성이라면 발생의 비가시성, 동적 비가시성은 잠재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비가시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생의 힘은 일상의 지각과 정서에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힘을 통해 만들어졌으나 이미 굳어져 힘의 존재를 가리는 지층들만을 본다. 예술의 일은 지층 밑, 속, 위, 너머에 있는 힘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예술의 과제, 잠재성-힘을 다루는 일은 미리 주어지는 현실성-지층에 기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무근거 혹은 카오스로부터 시작된다. 힘은 카오스다. 동적 비가시성 문제가 예술의 창작과 해석 모두에서 정적 비가시성보다 더 큰 어려움을 동반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려는 노력으로 예술을 정의하는 일을 상투성에서 건져 내준다.
김병호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긴장 내지 양가성은 상이한 두 비가시성의 병존에 기인한다. 김병호에게 현대 문명은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현혹과 의심, 매혹과 불만, 위험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낳는다. 그래서 김병호적 주체는 자각몽을 꾸는 주체, 문명과 시스템이라는 꿈을 꾸는 동시에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주체다. 때로 이 주체는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는데 이는 그가 현혹과 의심, 매혹과 불만 사이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화석처럼 생명과 죽음의 흔적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김병호의 관심 역시 이러한 양가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양가성은 대칭성과 다르다. 현혹-매혹과 의심-불만은 대칭적이지 않다. 김병호 작품에서 문제적인 것, 애써 읽어내야 하는 것은 문명의 유혹적 힘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다. 작품과 작업의 거의 모든 측면이 현대 문명의 유혹과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선명하게 가시화하는 데 기여함에 반해, 그에 대한 반항과 의심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병호 작업의 소수적 선은 바로 이 반항과 의심의 원천 혹은 발생을 추적하는 일과 관련돼 있다.
파울 클레(Paul Klee)의 말처럼 예술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세계관은 “현재의 세계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는 아니다”라는 태도다. 이 세계관은 사물이 사물이 되도록 하고 세계가 세계가 되도록 하는 힘에 대한 사유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현재의 세계를 낳은 힘이야말로 원리상 그것을 파괴하고 다른 세계를 낳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의심과 반항은 이 예술적 세계관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지금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며 그 바깥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의심과 반항이 가능하겠는가? 모든 살아있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불온하다면 그것은 지금 이 세계를 유일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현재 세계 속에 이미 다른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확한 진실(이 세계의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이 세계의 기준에서는 거짓인 다른 세계의 진실)”(Francis Bacon)을 창조함으로써 불온해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병호의 작업에서 반항과 의심의 발생, 비가시적 생성의 힘의 가시화 문제를 살피는 일은, 예술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또한 그런 한에서 그의 작품의 화려하고 매끈한 표면과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온’이라는 단어가 그것과 가질 수 있는 잠재적 관계를 살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살과 형상
문제는 힘, 즉 잠재성-카오스를 어떻게 가시화하느냐다. 김병호 작품에서 힘이 촉발하는 긴장의 형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가장 적절한 계기는 금속이 살이 되는 장면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함축하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힘과 살과 형상에 대한 일반적 숙고라는 준비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잠재성의 가시화를 현실화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화된 잠재성이 아니라 잠재성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다. 현실화된 힘은 이미 힘 자체와 다르다. 예술의 문제는 잠재성 자체에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다.
육체를 얻은 잠재성 혹은 잠재성의 육체가 형상(形象, figure)이다. 형상은 단순한 모양 혹은 형태와 구분되어야 한다. 힘의 포착을 통해 얻은 형태, 힘을 발생 원인으로 하는 형태, 그리고 역으로 바로 그 때문에 힘을 표현하는 형태, 그것이 형상이다. 표면적 형태의 왜곡이나 해체 또한 그것이 힘을 표현하는 한 형상의 폐기와는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은 구상이냐 추상이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힘은 형상을 통해서만 표현되며 그래서 예술, 특히 미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화’의 문제다. 들뢰즈의 말대로 밀레의 <만종>이 무게의 힘을, 세잔의 <생빅투아르산>이 산이 펼쳐지는 힘을, 고흐의 <해바라기>가 해바라기 씨앗의 가공할 발아의 힘을 포착하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작품들 속에서 형상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힘의 육체인 형상을 이루는 것은 물질-재료가 아니라 살이다. 살은 물질-재료로부터 오지만 살아있는 힘을 담지한다는 점에서 그것과 구분된다. 물론 살은 재료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 이는 물감 없이는 회화가 없고 단어 없이는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회화의 힘이 물질로서의 물감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고 또 단어 자체가 의미는 아니듯 재료와 살은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다. 재료는 힘의 감각을 가능케 한다는 조건에서만 살이 된다. 역으로 재료는 힘을 담지하는 살이 되는 한에서만 예술에 고유한 감각의 발생에 기여한다. 형상을 이루기 위해 재료는 살이 돼야 한다.
살-형상의 관계는 질료-형식의 관계와 다르다. 형상은 무생명과 비활성과 수동성의 질료 위에 형식이라는 틀을 부여함으로써는 얻을 수 없다. 살이 힘의 담지체라면 형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살을 따라 흐르는 힘 자체일 것이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시에는 창작되지 않은 것 같은 구절들, 저 혼자 생성된 것 같은 구절들이 있다고 말할 때, 미쇼(Henri Michaux)가 클레의 색들은 캔버스 위에서 서서히 태어난 것 같고 원초적 대지에서 솟아난 것 같다고 말할 때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질료-형식이 아니라 살-형상의 관계인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임을 자처하는 모든 것이 예술을, 살-형상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병호의 어떤 작품들이 구상과 추상의 구분을 넘어선 것으로 느껴진다면, 떨어지고 솟구치고 늘어지고 휘고 뻗고 부푸는 그의 금속의 운동이 질료-형식의 구도로는 적절히 설명될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이는 그의 작품이 살-형상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먹물로 된 꽃
꽃가루의 조용하고 비가시적인 증식 혹은 번식을 표현하는 연작들은 김병호가 세계를 움직이는 ‘비둘기 걸음’의 힘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서의 조각’이나 ‘필연의 공포’를 함축하는 선들의 집합에는 존재하지 않던 곡률(曲率/曲律)이 나타날 때, 그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세계를 짓는 잠재성에 대한 성찰,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김수영, 「꽃잎1」)의 힘과 무게에 대한 감각을 표현한다.
꽃가루의 조용한 힘에 대한 형상화와 연결해서 볼 때 의외의 긴장을 내포하게 되는 것은 반짝이는 타원구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기계적 시스템이 생산한 매끈한 동일성과 그 동일성들의 상호 반영-복제로 증폭되는 화려함을 통해 문명이 야기하는 ‘필연의 공포’가 실은 ‘현혹’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왜 아니겠는가? 시스템은 공포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 현혹 없는 공포는 체계를 정립하고 존속시킬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들은 두 가지 비가시성 가운데 첫 번째를 가시화하는 계열의 정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포스러울 뿐 아니라 매혹적이기까지 해서 더 완벽해 보이는 문명과 시스템의 매끈한 화려함은 꽃가루의 번식력에서 오는 압력과 긴장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압력과 긴장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형상을 안으로부터 봐야 한다. 작가에 따르면 극도의 화려함을 생산하는 핵심 요소인 타원구들은 사실 “비정상적으로 불거져 나온 살덩어리인 혹의 형상”이다. 그것은 혹처럼 부푼 덩어리진 욕망이다. 여기서 현대 문명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상투어들을 읊조리는 데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현혹이나 환상의 결과로 간주되는 욕망 개념을 넘어선 욕망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욕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생산의 힘, 원인이 되는 힘 즉 세계를 짓는 힘이라는 것이다. 혹의 이미지를 지우고 다른 관점에서 타원구들을 보면 관의 한쪽 끝에서 불어넣은 숨이 다른 쪽 끝에서 부풀어 오른 방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방울의 표면은 예쁨을 전시하며 반짝거리지만 방울을 안에서 부풀게 한 숨, 형상을 가능케 한 숨이 얌전히 그 예쁨에 갇혀 있으리라는 보장, 방울을 터뜨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욕망-숨이 안으로부터 가하는 압력이 타원구 연작들에 고유한 긴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금속은 살덩어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일차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욕망-숨의 힘으로 충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형상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살이 된다.
타원구 내부의 압력과 그 압력으로 인한 잠재적 파열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이 부푼 살의 형상을 아직 개화하지 않은 꽃봉오리의 형상과 겹쳐놓는다. 이렇게 보면, 광택의 무한 복제가 ‘조용한 증식’을 대체하고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표면의 일일 뿐이다. 관의 끝에서 매혹적인 타원구가 부풀게 한 관 속의 힘-욕망-숨은 <조용한 증식> 연작에서 꽃잎이 벌어지게 만드는 힘, 꽃가루를 세계에 내보내는 힘과 동일한 힘이다. 이 힘이 닫힌 타원구를 열어 ‘조용한 증식’을 가능케 할 나팔꽃잎 형상으로 벌어지게 한다면, 꽃가루는 <조용한 증식> 연작에서보다 더 다양하고 무질서한 방향으로 확산될 것이고 그래서 ‘필연의 공포’를 한층 더 자유롭게 벗어나는 운동을 낳게 될 것이다. 금속의 살-되기와 살의 꽃-되기. 되기 혹은 생성은 닳고 닳은 말이 되었지만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은 말처럼 쉽고 흔하지 않다.
살-되기와 꽃-되기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 발생의 힘의 카오스적 성격은 신(神)을 호명하는 작품들에서 전면화된다. 여기서 문명의 창조물이 주는 공포와 매혹은 절대화되어 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작가는 이 작품들의 테마가 기억이라고 말한다. 무엇에 대한 기억인가? 문명과 신에 관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작가의 답은, 신을 창조한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바쳐진 작품들의 본질은 신성모독에 있다. 주지하듯이 김병호는 문명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해 왔다. 그리고 이 탐구는 문명에 대한 다면적 진술들을 낳는다. 문명은 공포스럽다, 문명은 의심스럽다, 문명은 매혹적이다. 문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등등. 그런데 이제 이 모든 진술들 아래서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단 하나의 진술은 ‘문명은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다’인 것으로 보인다. 김병호가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이 문명의 현혹임을 투시하고 그것을 의심할 것을 권하면서도 결코 그 아름다움을 단순히 제거해버리는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창조자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숙고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을 짓는 힘은 말 그대로 문명-신들의 발밑에 있다. 신들의 발밑에서 출렁이는 먹물은 김병호의 작품에 따라붙는 전형적 라벨인 기계성, 제품성, 규칙성, 합리성 등을 소환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예외적이고 이질적인 재료 중 하나다. 검은 것(玄)은 동시에 깊은 것(玄)이기도 하다. 깊은 것은 검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이라야 감히 신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신들은 현현(玄玄)한 카오스에서 나온다. 카오스의 묵빛과 묵향이 발하는 현현함이 신들의 위압감을 위압한다는 데 이 작품의 핵심이 있다. 카오스의 무정형적 힘을 형상화하는 먹물은 물리적으로도 작품의 필수 지지구조를 감싸고 있다. 물리적 지지를 위한 구조가 묻혀들어간 것이 단순한 바닥이었다면 이 작품은 지금과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먹물이 시각보다 원초적인 감각인 후각을 통해 먼저 감지된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형상화를 한층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클레는 우주의 힘을 담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하나의 생각을 동반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형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비우고 치우고 청소해야 한다는 베이컨의 말 역시 같은 궤에 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를 소브리에떼(sobriété)라 했다. 단순, 간소, 소박, 고졸, 절제 등 이 단어가 담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든 그것을 김병호 작품의 특성으로 거론하는 일은 그의 작품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안전하지 못한 선택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신의 발밑에 있는 먹물에서 작가는 분명 모종의 소브리에떼에 접근하고 있다. 먹물은 발생의 힘, 금속관 끝에서 살이 부풀고 꽃이 피게 하는 힘의 원초성과 무정형성을 단순한 강렬함으로 형상화해낸다. 금속-살을 따라 흐르는 것, 금속-살로 꽃을 피우는 것은 바로 이 먹물이다. 김병호의 꽃은 먹물로 된 꽃이다.
물론 먹물-카오스가 개화(開花)의 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카오스는 삶을 짓는 힘이기도 하지만 삶을 위험하게 하고 때로는 거두어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것은 거대한 삶의 힘이지만 지층화된 세계의 관점에서는 말 그대로 혼돈과 파괴로 경험되기도 한다. 그 자체가 현대 문명의 엔진인 자동차의 엔진과 결합되는 부품을 재료로 사용한
Assembling for Eternity 1
2008, urethane rubber coating on stainless steel, 34x34x48cm
2008, urethane rubber coating on stainless steel, 34x34x48cm
카오스의 기념비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현대 조각사 전체가 조각이라는 장르의 시작점을 규정하는 기념비로서의 성격을 어떻게든 탈각하려는 움직임이었던 데 반해 김병호는 기념비의 문제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고민한다. 이것은 묘한 일인데, 힘의 포착과 표현을 예술의 본질로 규정하고 이에 근거해 김병호의 작업을 들여다본 지금까지 논의에 핵심적 통찰을 제공한 들뢰즈와 과타리 역시 예술을 기념비로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시 어떻게 시대착오를 피할 것인가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가 “어떤 것이 기념비라면 그것은 현대적이지 않으며, 현대적이라면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다”라는 말로 ‘기념비의 죽음’을 말한 것이 1937년이다. 그는 현대적 기념비란 말 자체로 모순이라 했다.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현대성을 보들레르적 의미로 사고하는 것이다. 기념비가 예술의 본질과, 그래서 영원성과 관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보들레르적 의미에서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기념비란 무엇인가?
들뢰즈-과타리에 따르면 예술로서의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을 기념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사건을 육화하는 지속적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대고 털어놓는다.” 이때 사건은 현재 속에 영원한 것이, 질서 속에 카오스가 틈입하는 일을 뜻한다. 로런스(D. H. Lawrence)는 카오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카오스가 두려워 인간은 자신과 영원한 소용돌이 사이에 우산을 하나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우산 안쪽을 하늘처럼 그린다. 그리고 우산 아래서 돌아다니고 살다 죽는다. 후손에 전해진 우산은 하나의 돔, 둥근 천장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시에서의 카오스」) 예술가는 우산을 찢고 카오스의 신선한 바람을 들여 하늘로 보이게 색칠된 우산 아래서의 삶이 우리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다. 예술-기념비는 바로 이 카오스의 존재와 힘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보존해 ‘미래의 귀’에 전하는 것은 카오스에 대한 감각이다. 예술은 결국 유한 속에 무한을, 순간 속에 영원을, 영토 속에 대지를, 집 속에 우주를 들이는 일이다. 기념비를 만든다는 것은 무한을 되돌려주는 유한, 영원을 되돌려주는 순간, 대지를 되돌려주는 영토, 우주를 되돌려주는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시의 탐침(探針)”은 교회당 뾰족탑에 달린 십자가 끝머리와 같은 것이고 그 아래 주춧돌까지 이어지는 건축적 실체의 정연함과 명석함은 시의 본질과 무관하며 오히려 그것을 방해한다고 말했다.(「시여, 침을 뱉어라」)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것은 저 탐침의 존재다.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렸다.
김병호의 탐침은 먹물이며 먹물로 된 꽃이다. 김병호는 기념비와 기억이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김병호의 기념비는 세계를 창조했고 지금도 창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창조할 힘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기념비 프로젝트는 명시적으로 기념비성을 표방하는 작품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욕망-숨으로 부푼 방울-꽃봉오리, 먹물이 흐르는 금속관, 묵향을 품은 꽃 자체가 카오스의 기념비인 한에서 말이다.
김병호의 바깥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두 가지 의미에서 김병호의 바깥에 대한 것이다. 우선 김병호의 작업이 카오스와 우리 사이에 놓인 우산의 바깥과 관계하는 방식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렇다. 힘-잠재성-카오스를 포착한다는 것은 질서와 시스템의 바깥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병호의 바깥에 대한 이야기인 두 번째 이유는 힘-살-꽃에 대한 강조가 김병호 작품의 주조(主潮)를 벗어나 때로는 작가 자신의 의도까지도 배반하는 읽기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목적이 비가시성의 가시화라면, 그런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는 이 글은 그 작업 자체 안에 있는 비가시성의 가시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작가 김병호와 그의 작품들이 자신 안에서 이미 자신의 밖으로 나가 있는 지점, 김병호의 이미 존재하는 작품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이 접하고 있는 지점에 확대경을 대는 일이기도 하다.
바깥과의 관계야말로 모든 살아있음의 징표다. 살아있는 작가만이 자신 안에 바깥을 품는다. 그리고 살아있는 작가만이 자신과 싸울 줄 안다. 세잔이 사과를 두고 상투형과 벌인 싸움처럼, 예술가에게는, 만약 그가 진짜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로런스의 평가대로, 세잔이 성취한 사과스러움(appleyness)은 회화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 중 하나지만, 정작 그를 예술적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이 성취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상투적 이미지들과 벌인 비타협적 전투와 정직한 패배들이다. 김병호는 바깥을 가진 작가다. 김병호가 추구하는 세상에 없는 형상은 오직 이 바깥과 그것이 걸어오는 싸움, 그리고 그 싸움에서의 정직한 패배로부터만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