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 ‘정원’이 들어간 작품 제목이 많은데 이는 역설적으로 들린다. 정원은 자연 자체는 아니지만 자연에 대한 동경, 자연에 대한 지향이 연상되는데, 김병호의 작품은 정밀한 설계도를 만들고 공장에 위탁 제작된다. 설계도를 바탕으로 규격화된 모듈을 생산하도록 한 다음 그 모듈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창작된다. 그래서 ‘정원’과는 직관적으로 먼, 현대 기계문명의 상징과도 같아 보이는데, 이를 ‘정원’이라고 명명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김병호: 정원은 인간이 손을 댄 자연이다. 옛날 시골집 뜰조차도 주인이 의도한 대로 식물과 나무를 심어 꾸미고 연출한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를 터전으로 생활하는데, 도시에 건물이나 대규모 단지를 지을 때 정원을 필수적으로 조성해 더욱 극적으로 연출한다. 그렇게 정원은 계획된 삶의 터전의 일부이며 또한 우리가 그리는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도시 밖의 날 것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도시 속에서 인위적으로 계획해 만드는 자연, 그것을 정원이라는 단어가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문소영: 그렇다면 정원이 우리를 둘러싼 인공의 물질적 환경과 제도적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도 같은데, 이와 같은 맥락의 작품들이 모두 ‘정원’의 연작인 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정원’인 것인가?
김병호: 첫 번째로, ‘정원’ 시리즈는 직선적이고 선형적인 특성이 강한 작업들이다. 형태에 따라 ‘수직 정원’, ‘수평 정원’으로 명명하는데, 수직수평 자체가 직선적이고 선형적이며 논리적으로 정렬된 느낌이다. 이것은 비자연적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설정으로 볼 수 있다. 그 단어가 주는 느낌대로,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인간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내가 개입하고 가져오고 싶어하는 것을 계획적으로 연출하는 작업을 ‘정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7도 기울어진 직선들로 이루어진 작업 ‘정원’(Garden, 2013)이 시리즈의 첫 작업이다. ‘정원’ 시리즈의 두 번째 특징은 반복적인 패턴, 대량생산되는 제품처럼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연에서는 개체들이 고유하고 언뜻 비슷해 보여도 모두 제각각 다르다. 반면 우리가 사는 현대 산업문명에는 동일한 제품이 많다. 그런 면을 작품에 대입했다. 동일한 형태가 계획된 패턴에서 만들어지고 복제되는 측면이 강하다. ‘정원’(2013), ‘선형정원’(Linear Garden, 2017)처럼 똑같이 짜인 알록달록한 선들이 열을 맞춘 작업도 있는 반면, ‘수직정원’(Vertical garden - beautiful replication, 2017) 연작처럼 하나의 모양이 어떤 패턴을 가지고 정렬이 된 작업도 있다. 분업화된 공정으로 만들어진 오브제들이 조립이 되어 하나의 제품이 되는 것처럼, 그런 작업 방법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정원’ 연작이 나온 것이다. 정원에 대해 말할 때 일본의 정원은 인공적이고 계획적인데 반해 한국의 정원은 더 자연적이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궁궐 정원도 결국은 연출된 것이다. 자연에 개입해 연출했다는 이질감은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한 진실이다.
문소영: 정원을 좋아해서 작업에 반영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는 말인가? 20세기 초 이탈리아 미래주의 작가들이 기계문명에 매혹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미래주의 작가들의 황홀감과 몰입과는 달리 작가의 작업은 관조적으로 보인다.
김병호: 오히려 싫었기 때문에 이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비판하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작가는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매번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건 아니다. 자연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한다. 사람들이 자연을 찾고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이 콘크리트 건물은 변하지 않는다. 콘크리트 건물의 각진 직선적인 시스템 안에서 나도 살고 있으며,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일면으로는 가지런히 정렬된 것을 좋아한다. 이런 양가적인 측면을 알기 때문에, 정렬된 것들을 좋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끄집어 드러내려 했다. 우리는 사실 수직수평, 직각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수평과 수직을 함께 갖고 있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가 직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집이나 빌딩이 직각으로 맞춰지지 않는다면 불안한 구조가 된다. 그래서 나의 작업에서는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든 직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직각의 편안함으로부터 각도를 비스듬히 변경해서 불안함과 두려움을 초래하는 것, 이 자체가 비인공적인 것, 결국은 자연적인 것으로 가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이 구조적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사람들은 불안해 하는데,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또 쾌감을 느낀다.
문소영: 작품 자체에 일종의 역설(paradox)이 있다. 정원은 자연을 흉내낸 것이지만 오히려 매우 인공적이고, 작가의 ‘정원’ 연작은 현대 산업문명의 인공 환경을 표현하고 있지만 인공을 탈출한 자연적인 것의 불안한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2016년에 송광사에 설치한 일종의 불탑 ‘매개기억’(Mediated Memory, 2016)도 공장 주문으로 생산한 금속 모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듈을 조립해 만들어진 탑이 자연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점점 어둡고 묵직한 빛깔로 변하게 된다. 이것도 어떤 역설을 의도했나?
김병호: 그렇게까지 의도한 건 아니다. 작업을 1부터 100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의도하진 않는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전형적인 한국 3층 석탑의 구조에 따라서 기단부와 탑신부와 상륜부가 있는 탑의 형태를 만드는 것, 그리고 탑의 재료를 브론즈로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번쩍이는 금색으로 광택을 냈다. 오브제가 가진 현대적 느낌을 강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변해가도록 의도한 작품이다. 하지만 역설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역설인 것 같다. 그것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다. 작업에 있어서 어떤 모순을 느끼고 이를 고민하진 않는다. 산업화되고 분업화된 사회 시스템을 활용해서 작업을 하는 게 매우 흥미롭고, 또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 내가 여기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내 성향과 태도가 그동안 살아온 환경 속에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방향을 취해 나갈 것인가에 더 고민하는 것 같다.
문소영: 그런데 ‘정원의 단면’(A Section of the Garden, 2017), ‘문명의 단면’(A Cross Section of Civilization, 2017) 같은 작품명을 보면 정원을 잘라서 그 단면을 드러내고, 문명을 잘라서 그 단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김병호: 단면을 본다는 것은 대상을 미지의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과 욕구에 의해서 또는 어떤 해석을 위해서 잘라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쾌감도 있는데, 예를 들면 어떤 기계의 단면을 볼 때 그 내부의 기능과 숨겨진 메커니즘을 보는 쾌감이 있다. 결과적으로 단면은 다양한 형상과 기능을 평면으로 보이게 만든다. 평면을 만든다는 게 중요한 설정이다. 나는 2017년 이후로 평면성에 집중하고 있다. 평소 ‘문명은 평면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한다. 평면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고 인공적인 것으로서, 문명의 진행을 위해, 즉 우리만의 바벨탑을 만들기 위한 접근 방법의 기초로서 필요한 것이다. 학문도 평면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평면을 전제로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기하학과 여러 수학적 방법론에서 보듯이 말이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우리는 환경을 평평하게 만들어왔다. 그 위에서 안주하고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 평면을 보고 평면을 만든다는 것은, 이 물질문명으로 만들어진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 그리고 평면이 많은 공간에 적응해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예술적 접근 방법이기도 하다.
문소영: 하지만 ‘정원의 단면’을 보면 평면이 세워지고 구부러져 공간을 품고 입체를 형성하고 있다.
김병호: 평면은 추상적인 개념이라 그것을 물리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두께라는 설정이 필요했다. 그 두께가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두께의 사전적 의미는 평행을 이루고 있는 평면과 평면 사이의 간격이다. 이것은 비자연적인 설정인데,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테이블, 의자 등 우리 일상 용품을 구성하는 많은 자재들이 규격화된 평면으로서 두께를 통해 물리적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부채 형태로 펼쳐진 ‘정원의 단면’의 경우 앞에서는 봤을 때는 화려하지만 옆에서 봤을 때는 단면과 단면만 붙어 있는 상태여서 얇은 두께가 두드러진다. ‘문명의 단면’도 앞에서 본 모습보다 알루미늄 판의 두께가 보이는 옆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께가 보이는 면이 주변 환경과 빛에 의해 아름다운 반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는 결국 현대 물질문명의 단면이며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문소영: 주변 환경과 빛에 의해 화려한 반사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특히 강했던 작품으로 ‘수평정원’(Horizontal Garden, 2018)과 ‘수직정원’(Vertical garden - beautiful replication, 2017)이 생각난다. 특히 후자는 그 효과가 아예 제목에도 명기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요소인, 직선 끝에 달린 타원형의 구체는 꽃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
김병호: 그 타원구는 직선에서 혹이 나온 것이다. 직선과 평면의 계획적이고 인공적인 환경에서 튀어나온 덩어리들, 일종의 변종이다. 문명의 혹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 단어부터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지만, 우리 문명에서 불거져 나온 욕망의 덩어리들이 아름다움의 결정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수평정원’의 경우, 문명의 혹들이 빛을 반사하고 서로를 반영•반사해 반짝이면서 마치 하나의 샹들리에처럼 현란한 아름다운 덩어리가 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그것을 위해 가공된 금속이 최적의 형태를 갖추도록 설계하고 마무리했다. 또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타원구가 최대한 촘촘하게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더 많은 타원구가 서로 가까이 있을수록 더 많은 반사를 일으켜 화려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혹의 현란하고 현혹적인 면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비판한다기보다 나 또한 그 현란함에 매혹되는 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소영: 더 이른 시기 작업 중에 ‘조용한 증식’(Silent Pollens, 2009), ‘300개의 조용한 꽃가루’(Three-hundred Silent Pollens, 2009), ‘조용한 증식’ (Silent Pollens – Blue, 2009), ‘조용한 증식’ (Silent Pollens – Black, 2010)처럼 조용한 꽃가루라는 표현이 제목에 들어간 작품들이 여럿 있다. 이 작품들의 경우 형태가 꽃술이나 나팔 같고 사운드가 있는 작업인데, 사운드 작업이 오히려 고요하단 말처럼 들린다.
김병호: 식물 중에 꽃가루를 퍼뜨리기 위해 벌과 새를 이용하는 것도 있지만 바람을 이용하는 식물도 있다. 풍매라고 한다.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조용히 퍼지고 안착해서 수정이 되고 열매를 맺고 하는 것이 문명과 연결되어 연상된다. 문명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오기 때문에 우리가 ‘문명이 이렇게 시작해서 저렇게 되었구나’ 하고 단박에 파악할 수 없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이클, 한 생명 개체의 사이클보다 훨씬 긴 사이클이다. 그런 거시적인 사이클에서 조용히 전파되고 확장되는 것을 작업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확장성을 암시하는 나팔 형태와 사운드가 그 표현의 일환이다. 물질적인 오브제 작업에 비물질적인 소리라는 요소를 넣고 싶기도 했다.
문소영: 그런데 관람자가 소리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을 막기 위해 소리를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게 설치한다고 들었다. 소리를 능동적으로 듣는 게 가능한가?
김병호: 내 작업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산업 생산 재료들로 만들어졌듯이 작품에서 나오는 소리도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일부 작품의 소리는 마치 새소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매우 비슷하다. 두 가지 소리의 파장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소리는 익숙한 소리이기 때문에 듣고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또한 볼륨으로 따지면 꽤 작기 때문에 조용한 전시장 안에서는 절반 정도의 사람이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상업공간에 가면 주변 소음 때문에 10명 중에 1명이 들을까 말까 한다. 그래서 작품의 소리가 들리기를 강요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듣고자 할 때만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문명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히 진행되고 확산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그 속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의식해야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도 마찬가지다. 현대에는 미디어가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서 그냥 도처에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미디어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이런 작업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용한 증식’(Silent Propagation)이라는 제목의 연작도 있다. propagation은 번식, 증식, 선전, 전파를 동시에 의미한다. 결국엔 우리가 익숙하게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소영: 이 책에 작품 설계도가 실린다. 마치 작곡가들이 악보를 남기면 후대에 다른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의도하는 건가?
김병호: 그런 것도 흥미롭다. 설계도에 의해서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은 보통 에디션(edition)을 3개, AP(artist proof)까지 해서 총 4개를 만든다. 에디션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목적이고, AP는 작가 보관이니 추후 전시용으로 활용한다. 내 작품은 제작도면이 있기 때문에 에디션 3개를 각기 다른 나라에서 만들기도 한다. 전시나 작품 구매자가 외국에 있다면 운송비나 관세 등의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사후에 다른 사람이 만들 수도 있겠다.
문소영: 개념미술의 경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같은 아티스트는 ‘이러이러한 사탕 무더기를 전시장에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쌓아놔라’라고 지시했고, 그의 사후에도 그렇게 전시되고, 그냥 그것이 작품이다. 그러니 작가의 설계도가 작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의 조각은 산업생산으로 만들어지니 완성작에 꼭 작가의 손이 닿아야 되는 건 아닐 수 있다.
김병호: 그렇다. 나는 캐드(CAD) 도면으로 작품을 설계하니 똑같이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규격화된 재료를 쓰면 된다. 작품에 색을 내는 여러 가지의 방식마다 고유색상 도표가 있고, 색상 번호가 있다. 나중에 일부 빠지거나 추가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설계도를 가지고 나중에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
문소영: 모차르트의 음악을 그가 살았을 때는 자신이 연주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연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신의 작품이 개념적이라고 생각한다. 물성이 매우 강하면서도 한편으로 개념적이다. 나중에 이를 유언으로 남겨도 될 것 같다. ‘내 작품은 음악 같은 미술이다. 작곡가가 사후에 남긴 악보로 누구나 그의 곡을 연주할 수 있듯이 내가 남긴 설계도로 누구나 내 조각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한다.’ 그러면 FM 클래식방송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누구누구 연주” 이렇게 나오는 것처럼, 먼 훗날 “김병호의 ‘정원’, 누구누구 제작’ 이렇게 나올 수도 있겠다.
김병호: 멋진 아이디어다. 누구든지 만들 수 있게 오픈 에디션(open edition)도 두어야겠다. 엔지니어가 아니더라도 장난감을 조립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도면화하면 좋겠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이 미술을 즐길 수 있다. 미술시장을 통해서 유통되는 작업도 있고, 오픈 에디션으로 설계도를 공개하는 작업도 하는 것이다. 작곡가가 악보를 출판하듯 도면 자체를 유통시키는 행위 말이다. 사람들과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매개기억’(Mediated Memories, 2016)도 오브제는 굉장히 현대적으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 출발은 작품을 공유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공동체의 정서에 접근하려 했고, 그래서 사찰의 탑이라는 상징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한 것은 시스템에 그냥 뿌려버리는 것이다. 마치 전단을 살포하는 것처럼.
문소영: 그렇게 해서 수백 수천 년 동안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적 숭고(崇高)함을 획득하면서 말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숭고(sublime)의 원천 중 하나는 무한성(infinity)이다”라고 했다. 숭고에는 공간적 숭고와 시간적 숭고가 있을 수 있는데, 작품을 보면 공간적으로도 모듈의 반복을 통해서 무한으로 확장하는 느낌이다. 버크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나 패턴이 그것이 끝난 뒤에도 일종의 잔상 효과에 의해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무한성에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매개기억’도 그런 느낌을 주고, 게다가 원래 인류의 탑 건축이라는 게 상승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인데, 숭고의 어원인 라틴어의 수블리무스(sublimus)나 그리스어 히프소스(hypsous)는 모두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1년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 개인전에서 작업을 처음 보았는데, 그때 본 ‘조용한 충돌’(Soft Crash, 2011)도 작품이 실제로 차지하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민들레 홀씨나 은백색 섬광과 함께 폭발하는 별 등을 연상되는 작업이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졌지만 물질을 넘어서 점유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해 무한으로 확장하는 느낌을 주었다. 가운데 전자기판 진동으로 나오는 일정하고 연속적인 사운드가 확장의 느낌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형태가 있는데도 형태가 없는 것 같은 느낌, 형태를 넘어서는 느낌을 받았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분하면서 ‘미적인 것은 대상의 형식과 관련이 있고, 형식은 한정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숭고한 것은 무한정성이 표상되고 상상되는 무형식의 대상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작가는 이런 것을 작업에서 염두에 두나? 숭고의 창출을 의도하고 작품을 제작하는지 묻고 싶다.
김병호: 창문을 통해 옆 건물을 볼 때 건물이 커서 위와 아래가 안 보이면서 건물 구조의 반복되는 패턴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이런 것에서 기계적인 숭고를 느낀다. 숭고는 구체적인 형상과 익숙한 환경보다는,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경해 보이는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으로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어떤 의미와 앞으로 가능성에 대한 확장 등 그런 여러 가지가 느껴질 때 숭고함이 보이는 것 같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사실 원은 비자연적인 요소다. 원은 직선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문명에서는 기하학의 요소를 우리 삶에 가져왔는데, 이는 이제 매우 익숙한 환경이 된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낯선 것이기도 하다. 숭고는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익숙하지 않게 느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모습은 사람 형태를 띠고 있고 그런 익숙한 형태를 우리는 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질들이 바탕이 되고, 그것들의 익숙한 스케일, 그것들의 결속에 대한 어떤 태도에서 숭고가 나올 수 있다. 전혀 낯선 것에서는 오히려 숭고가 창출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 자체도 숭고성을 갖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 안료나 아니시 카푸어가 사용하는 반타블랙(Vantablack)은 그 물질이 낼 수 있는 아주 영험한 느낌, 그것이 숭고일 수 있고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것이다.
문소영: 반타블랙은 빛을 거의 흡수해 반사광이 없는 검은색 물질이라 2차원인지 3차원인지, 칠해진 평면인지 입체인지 암흑의 공간인지 구분이 안 돼서 물질임에도 비물질적이다.
김병호: 맞다. 물질인데 비물질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오브제인데 그것이 집단적으로 구성되어 반복 패턴화되면서 물성이 사라지고 비물질화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벽돌 하나만 놓여있으면 벽돌의 물성을 의식하지만, 벽돌 기둥의 벽돌은 기둥의 수직•수평 패턴으로 본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적용하는 것 같다.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진 선재•튜브•판 등의 오브제를 패턴화해 잘 정렬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환경에 대해서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이런 환경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무엇을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 일상의 디테일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유년시절부터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든 나와 물건과의 관계든 항상 지켜보면서 고민하는 태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도 한때는 철학과에 가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많이 관찰하는 편이다. 산업화된 환경의 일상적 물질과 형태에서 경험적 기능성을 제거하고 재배열하고 조합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것이 내 의도인 것 같다. 숭고보다 감동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감동도 있지만 무서운 감동도 있을 수 있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대했던 일상적 물질과 형태의 오브제들인데 그것이 기념비화될 수도 있고, 또는 생경하게 불안한 형태로 나타남으로써 쾌와 불쾌의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다. 그게 숭고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